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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강승민.김성룡] '바지 입은 여자들'이 옵니다. 치마건 바지건 모두 입을 수 있는 것이 여성들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죠. 스코틀랜드 지방의 전통복인 남성용 치마 '킬트' 정도를 빼면 말이죠. 그래서 여성들은 원피스나 투피스 말고 바지로 된 정장도 입습니다. 여성 바지 정장의 상의는 마치 잘 재단된 남성의 양복 재킷과 비슷하다고 해서 '테일러드 재킷'이라고 합니다.
사실 '바지 입은 여자들'은 1980년대 미국의 거리를 활보한 적이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사회 현실이 반영됐죠. 하지만 그간 공적인 자리에 청바지를 입고 나가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캐주얼 복장이 강세를 띠다 보니 이런 여성용 바지 정장은 살짝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바지 차림의 여성들이 다시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다네요.
글=강승민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quoique@joongang.co.kr# 여성, 바지 입고 돌아오다미국의 인기 TV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짧은 머리의 잘나가는 변호사 미란다는 '가끔' 바지 정장을 입었다. 성(性) 칼럼니스트 캐리가 화려한 구두와 드레스로, 홍보대행사 중역 사만다가 가슴을 노출한 옷으로, 아트 딜러 샬롯이 단정하고 고상한 차림으로 승부를 겨뤘던 것과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전문직 여성 미란다도 바지로 된 정장을 '가끔' 입었을 뿐 항상 그런 스타일을 고집하진 않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 네 명은 실제로 바지보다 치마를 선호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됐던 '섹스 앤드 더 시티'는 당시 세계 젊은 여성들의 패션 감각을 대변했다.
'테일러드 재킷'의 부활은 지난해 하반기 열린 2007 봄.여름 여성복 패션쇼에서 예고됐었다.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는 턱시도 느낌의 재킷을 파리 컬렉션의 '1번 타자'로 내세웠고, 앤 드뮐미스터와 스텔라 매카트니 역시 파리 컬렉션에서 쭉 뻗은 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여성용 수트와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정장 재킷을 각각 선보였다.
봄맞이에 들어간 패션계에는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확인되고 있다. 꽃무늬와 레이스 등의 여성적인 니트를 주로 선보였던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소니아 리키엘조차 올 봄에는 패드를 넣어 '어깨'를 강조한 바지 정장을 선보였다. 제일모직이 미국에서 수입해 올 봄부터 판매에 들어간 브랜드 띠어리 역시 여성용 바지 정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고급 브랜드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가격대의 제품군에서도 바지 정장을 내놓고 있다. 캐주얼 브랜드인 허스트의 경우 이번 봄부터 바지 정장을 내세운 별도의 라인을 구성했다. 코데즈컴바인.와이케이038.제시 뉴욕 등도 사정은 비슷하다.
# 30대 전문직 여성의 자기선언패션 전문기자인 토비 피셔-머킨은 여성의 옷에 숨겨진 의미를 분석한 '드레스 코드'에서 이렇게 썼다. "여성용 장신구도 하지 않고 남성복 스타일의 정장과 타이를 갖춘 여성은 '아무리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해도, (나는) 어떤 남성하고도 경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준다"고.
우리 사회 '테일러드 재킷'의 유행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전문직 진출도 이런 추세에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 만들어진 전문.관리직의 70%가량을 여성이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웨어펀인터내셔널 마케팅실 서정연 팀장은 "올 들어 눈에 띄는 여성패션의 남성화 바람을 '남성에 대한 여성의 도전'으로 해석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직업과 관련된 한국 남녀의 달라진 위상이 투영된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패션계는 커리어 여성들의 '소비파워'를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가 유통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하반기 소비시장 전망과 과제 조사'(2005년)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주목할 소비집단으로 남성(7.7%)보다 여성(92.3%)을 압도적으로 많이 꼽았다. 세대별로는 30대(61.5%)가 20대(26.2%)보다 훨씬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과거에 비해 30대 여성이 최고의 소비집단으로 떠오른 것이다. 패션계는 이들 30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책'의 하나로 '바지 정장'을 속속 내놓고 있다.
#그래도 '여성'을 포기할 순 없다바지 정장을 갖춰 입은 여성이라고 딱딱하고 엄숙할 필요는 없다. 바지 정장에도 나름의 여성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방법은 있다. 특히 올해 선보인 바지 정장은 다양한 방법으로 여성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예컨대 재킷의 소매 끝이나 네크 라인을 레이스나 러플(천을 덧댄 부분에 주름을 잡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프릴보다는 나비가 넓은 것)로 장식하는가 하면, 재킷 안에 입는 셔츠나 블라우스를 화려하게 내놓고 있다.
영화 '사랑 따윈 필요 없어'에서 문근영이 입었던 목 부분에 러플이 달린 블라우스처럼 화려한 것을 안에 입고, 장식이 많지 않은 기본형 재킷을 선택하면 분위기가 훨씬 경쾌해진다.
단정함과 화려함을 섞는 것도 요령이다. 꽃무늬나 체크무늬의 재킷과 바지를 입을 경우 안쪽에는 목 부위가 넓게 파인 니트나 단정한 흰색 셔츠를 갖춰 입어 보자. 충분히 여성적인 분위기를 낼 수 있다.
겹쳐입기도 딱딱해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짧은 길이의 검정 재킷에 엉덩이를 덮을 정도의 셔츠를 함께 입고 청바지를 맞추면 캐주얼 감각으로 테일러드 재킷을 소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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