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왼쪽부터 차례로 패브릭 스타일링을 맡았던 품(www.epuum.com)의 이재연 씨, 인테리어를 맡았던 스타일리스트 이길연 씨(www.cyworld.com/kilyeon76), 이 집의 안주인 정지영 씨. 집 공사가 끝난 후에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오른쪽 진주처럼 반짝이는 유리타일과 지브라 흑단이 세련된 감각의 첨단을 보여주는 주방.
블랙은 가장 세련된 컬러로 정평이 나 있다. 미국의 디자이너 도나 카란, 샤넬의 수석 크리에이터 칼 라거펠드 등 세계 유수의 디자이너들이 블랙을 최고의 색으로 꼽고 디자이너 자신의 옷 컬러로도 즐겨 선택한다. 블랙은 가장 카리스마 있으며 품격 높을 뿐 아니라 현대적인 세련미까지 드러낸다. 정지영 씨 댁을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메인으로 사용한 감각적인 블랙 컬러. 깊고 진한 블랙과 다양한 채도의 그레이, 그리고 화이트를 적절히 믹스 매치해 블랙의 매력을 차분하지만 화려하게 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세련된 감각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과감하고도 멋스럽게 매치한 마감재. 현관문을 열자마자 은빛으로 반짝이는 타일은 메탈과 자개를 반씩 섞은 듯한 느낌이다. 거실 벽은 마치 금속판처럼 보이는데 만져보니 벽지. 직접 그 촉감을 느끼기 전에는 당연히 금속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 시각적 재현이 완벽하다. 벽지의 진일보를 체감하는 순간. 주방에는 품격 있는 지브라 흑단과 진주 펄처럼 반짝이는 유리타일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들여다볼수록 이 집, 입고 있는 옷이 너무나 세련됐다.
1 마치 금속판을 연상시키는 벽지는 세덱에서 구입했다. 오래된 아파트가 메탈릭한 질감으로 모던하게 변신했다. 2 반짝이는 광채가 화려한 현관이 제일 먼저 손님을 맞는다. 논현동 윤현타일에서 구입한 타일로 마감한 것. 구두가 많은 편인 정지영 씨를 위해 신발장을 크게 만들었다. 실버 펄의 글라스 도어를 사용해 현관의 색감과 통일했다.
정리 해고 1호는 낡은 구조 지금은 그 어느 최신형 아파트보다 스타일리시한 인테리어를 자랑하지만, 이 집은 작년 초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았던 스타일리스트 이길연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기절할 정도였지요. 네 식구가 사는 37평짜리 집인데 어찌나 짐이 많은지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채광이 약해 어둑한 집에서 그 짐을 죄다 이고 지고 살고 있었죠.” 어디서부터 무엇을 고쳐야 할지 가슴이 답답해져왔다며 그는 웃으면서 전한다. 현관은 ‘콩알’만 해 운동화 네 켤레만 놓아도 가득 찰 정도였고,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식탁이 떡하니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 같은 다이닝룸은 부엌과 중문으로 분리되어 있어 동선마저 불편했다. 그리고 가장 큰 방은 두 아들의 침실로 할애하고 정작 가족의 중심인 부부는 작은 구석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지영 씨 댁의 리모델링은 조금 과장하자면 ‘스타일을 바꾸어볼까’의 차원이 아니라 ‘우선 공황 상태인 집을 구제하고 나서 스타일이란 것을 한번 도입해볼까’하는 수준이었다고 할까.
그처럼 불편한 집에서 끙끙거리며 살면서도 정지영 씨는 리모델링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살고 있는 집을 고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견물생심이라고 인테리어를 새로 한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부러워서 저도 마음먹게 되었어요. 잠깐 불편하더라도 제대로 된 집에서 살아보자고요. 집을 채운 짐을 다 빼내고 가족들은 한두 달 오피스텔에서 생활하기로 작정하고 드디어 리모델링을 시작한 거죠.”
1 특히 침실은 패브릭에 신경을 많이 썼다. 부부 금슬이 좋은 두 사람을 위해 호텔 같은 느낌으로 연출했다고. 침실 커튼은 모던한 집에 잘 어울리는 그래픽적인 가죽 타공 제품으로 동현 인터내셔널에서 구입한 것. 집 전체의 패브릭 디자인은 품에서 담당했다. 2 방이 세 개인 이 집에서 서재는 꿈도 못 꿀 공간. 며칠을 고민하다가 침실에 가벽을 만들고 초미니 서재를 만들었다.
인테리어는 결심을 하게 한 그 후배의 집을 맡았던 이길연 씨에게 의뢰했다. 스타일리스트 이길연 씨는 벽까지 모두 철거하자고 제안했다. 벽도 많고 입구도 좁은 등 기존 틀 안에서 상상력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고, 어차피 난방?전기겮層?공사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 그래서 아파트의 하중을 지지하는 내력벽을 제외한 모든 벽을 철거했다. 그러고 나니 거짓말처럼 집이 운동장만큼 넓어졌다. 마구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떠오른 아이디어는 스타일리스트와 집주인이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수정되고 숙성되었다. “벽을 철거한 먼지 구덩이 집에서 3주 동안 두 사람이 살다시피 했어요. 빈 집터에서 굴러다니는 판으로 가벽을 설정해보고 매직으로 위치를 그려가며 공간을 어떻게 나눌지를 날마다 연구했지요. 터만 같을 뿐 집을 통째로 새로 지었다고 보시면 돼요.”
3, 4 진한 블랙 식탁, 클래식한 샹들리에, 반짝이는 유리타일로 연출한 다이닝룸은 차와 와인을 즐기는 공간이 되었다. 오른쪽 진주처럼 반짝이는 유리타일과 지브라 흑단이 세련된 감각의 첨단을 보여주는 주방.
1 컬러풀하고 귀여운 소품이 장식된 첫째 호진이의 책상. 2 인형을 자신의 또 다른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유난히 인형을 좋아하는 유진이 방. 벽지와 케노피 등은 아이가 평소에 좋아하는 색인 그린 컬러로 선택했다. 조명갓의 소재인 패브릭까지 연두색으로 통일했다.
카페 같은 주방, 호텔 부럽지 않은 침실 구조를 결정하는 틈틈이 집 내부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살펴보러 시장 조사를 다녔다. 논현동, 신사동 가로수길, 청담동 등 인테리어 상가가 밀집한 지역을 샅샅이 훑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이 작업에 매달렸던지 나중에는 둘 다 입술이 부르트고 딱지가 앉았을 정도.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정지영 씨는 그만 지쳐서 의견을 물어보는 이길연 씨에게 “그냥 알아서 해. 이제 난 몰라”를 연발하기도 했다고. 다른 집 인테리어 작업보다 딱 네 배 더 힘들었다고 이길연 씨는 증언한다. 그럼에도 확 달라진 모습에 놀라고 기뻐할 이 집 식구들을 생각하면 ‘엔도르핀’이 솟았다고. 이 같은 그들의 고생은 보람이 있었으니, 리모델링 후 이 가족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워킹 마더인 정지영 씨는 가뜩이나 불편한 주방에서의 일을 되도록 피했지만 이제 요리하는 것이 즐거워졌다. 동선도 한결 편해졌고 별것 아닌 음식을 만들어도 근사하게 폼이 난다. 카페 대신 식탁에서 친구들과 다과를 즐기고, 주말엔 꼭 집에서 요리를 만들어서 그럴듯한 식사를 한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한결 달라졌다. TV에만 열중하던 아이들 때문에 과감히 거실에서 TV를 치웠더니 거실도 깔끔해졌고 가족 간에 대화도 많아졌다.
3 거실의 라탄 데이베드는 이 집의 막내 유진이가 좋아하는 가구. 잠이 덜 깬 아침에는 항상 위에서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린다. 4 파란색을 메인 컬러로 연출한 호진이의 방. 선명한 파란색의 블라인드가 벽지, 침구와 조화를 이룬다. 침대 밑과 같은 자투리 공간도 놓치지 않고 수납 공간으로 활용했다.
(위) 침실의 가벽에 막내 유진이가 만들어 붙인 가족 그림. 진회색 타일로 완성된 벽에 삐뚤빼뚤한 그림이 붙어 있는 풍경이 재미있는 대조를 이룬다. 타일로 마감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낙서를 해도, 메모나 그림을 붙여도 부담 없다.
대신 부부 침실에 TV를 놓았는데 TV를 보러 엄마 아빠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과 살을 맞댈 수 있어 좋다. 침대 헤드보드 뒤로는 가벽을 세워 작은 서재를 만들었다. 넓은 책상 하나가 전부인 초미니 서재이지만 남편에겐 둘도 없는 보물 공간. 매번 아이들 방에서 컴퓨터를 썼는데, 이제 편하게 못다 한 업무를 본다. 오히려 아이들이 이곳에서 엄마 아빠가 보는 앞에서 인터넷을 하고 숙제를 하게 되었다. 열한 살, 여덟 살인 아이들의 방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컬러풀한 공간. 아이들이 각자 좋아하는 색을 반영해 큰아들 호진이 방은 파란색으로, 둘째 유진이 방은 연두색으로 꾸몄다. 책과 장난감으로 짐이 많은 만큼 침대 밑 같은 자투리 공간은 수납공간으로 이용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릴 뿐만 아니라, 주부가 뜻을 품으면 30년 된 아파트도 이처럼 변신할 수 있다. 말끔히 정리된 공간, 블랙과 메탈 질감으로 감각적인 인테리어. 달라진 집에서 누리는 일상에 정지영 씨는 대만족이다. 벽 하나, 마감재 하나까지 일일이 챙겨가며 몇 달의 고생 끝에 얻은 값진 변화다. 무엇을 하는 데 나중은 없다. 정말로 원한다면 ‘지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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